요셉, 꿈과 구덩이와 감옥을 지나간 길
요셉, 꿈과 구덩이와 감옥을 지나간 길
창세기 37:12-36; 39:1-23
함께 읽을 말씀: 창세기 40-45장; 50:15-21
요셉의 이야기는 꿈으로 시작되지만, 그 꿈은 곧 구덩이로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아들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들판에서 붙잡혀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지며, 낯선 상인들의 손에 이끌려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집과 아버지와 형제들, 자기 이름이 불리던 익숙한 세계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애굽의 관리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그는 주인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다시 감옥에 갇힙니다. 꿈을 해석해 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요셉을 잊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마치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길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구덩이로, 구덩이에서 노예의 집으로, 노예의 집에서 감옥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이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반복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은 요셉이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을 때만 함께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도, 이방 땅의 노예 생활에도, 억울한 감옥에도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요셉에게 고난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고난 한가운데서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모든 고난이 곧바로 좋은 결말로 바뀐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또한 상처 입은 사람에게 “나중에는 다 잘될 것”이라고 가볍게 말하게 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겪은 배신과 노예 생활, 성적 유혹과 거짓 고발, 투옥의 고통은 실제였고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믿음은 길의 모양이 언제나 평탄하리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길에서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받은 아들, 미움받은 형제
창세기 37장 앞부분은 요셉이 열일곱 살에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았다고 소개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여러 아들보다 더 사랑했고, 그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 옷이 정확히 어떤 모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야곱의 특별한 사랑과 구별된 대우를 나타내는 옷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요셉을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 안에서 편애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 이삭의 편애와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가 낳은 갈등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역시 요셉을 특별히 사랑함으로써 또 다른 형제 갈등의 씨앗을 만들고 있습니다. 죄와 상처의 방식은 회복되지 않으면 다음 세대로 반복되기 쉽습니다.
요셉은 두 번의 꿈을 꿉니다. 첫 꿈에서는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단에 절하고, 둘째 꿈에서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합니다. 이 꿈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미리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그 꿈을 듣고 더욱 그를 미워합니다. 아버지 야곱도 요셉을 꾸짖지만, 그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요셉에게 꿈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지만, 형제들에게는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와 가능성을 볼 때 기뻐하기보다 비교와 시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형들의 문제는 요셉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랑 앞에서 미움과 질투를 키운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 역시 아직 젊고 미숙한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고,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본문은 요셉의 태도를 상세히 평가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의 초반부는 한 가정 안에 있던 여러 균열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처음부터 완성된 성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성숙한 요셉을 긴 시간 동안 빚어, 한 민족과 여러 나라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도단의 구덩이, 형제들의 악한 선택
창세기 37장 12절 이하에서 형들은 세겜 근처로 양을 치러 갑니다. 야곱은 요셉을 보내 형들의 안부와 양 떼의 형편을 알아보고 오게 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찾아 나섰고, 세겜에서 찾지 못한 뒤 도단까지 갑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따라 형들을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는 형들의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꾀합니다. 그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을 단지 동생으로 부르지 않고 꿈꾸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을 조롱하며,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미움은 종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는 시도로 나타납니다.
르우벤은 요셉을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안합니다. 본문은 르우벤이 후에 요셉을 건져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려는 생각이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형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그를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앉아서 음식을 먹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잔인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는 곁에서 다른 사람들이 평소처럼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요셉은 구덩이 안에 있고, 형들은 그 위에서 자기 욕망과 미움에 따라 행동합니다. 죄는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낼 때, 그 사람의 눈물과 생명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여 피를 흘리는 것보다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그는 형제의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에 동의합니다. 결국 요셉은 지나가던 상인들의 손을 거쳐 애굽으로 팔려 갑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이스마엘 사람들과 미디안 상인들이 함께 언급되어, 정확한 거래의 장면을 읽는 데 다소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분명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악한 선택으로 인해 낯선 땅의 노예가 됩니다.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에 염소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가져갑니다. 야곱은 그것을 보고 악한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었다고 믿으며 깊이 슬퍼합니다. 한때 야곱은 염소 가죽과 형 에서의 옷을 이용해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들은 염소 피와 요셉의 옷을 이용해 그를 속입니다. 죄는 종종 자신이 뿌린 방식으로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악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내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을 꺾으려고 했지만, 바로 그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일이 훗날 꿈이 성취되는 길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며, 인간의 죄를 승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악이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노예의 집에서도 함께하신 하나님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이며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립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는 완전히 추락한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이제 이방 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방향을 선택할 수 없었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우리는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말은 그가 노예가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말은 그가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타국의 노예였고,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요셉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은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했고,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깁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즉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지만, 노예의 집에서도 그에게 지혜와 신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우리의 환경을 단번에 바꾸시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시고, 맡겨진 일을 충성되게 하시며, 사람들 앞에서 신뢰를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화려한 기적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드시는 힘도 은혜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장막에서는 사랑받는 아들이었지만, 보디발의 집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시기 전에 먼저 섬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책임질 요셉은, 먼저 한 가정의 일을 맡아 충성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일을 맡기시기 전에 작은 일에서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다루십니다.
유혹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한 사람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말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요구합니다. 요셉에게는 매우 위험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는 노예였고, 주인의 아내는 그보다 훨씬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요구를 거절하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는 주인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겼지만 자기 아내만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사람의 눈만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 고백은 요셉의 신앙을 보여 주는 핵심입니다. 그는 애굽에 있었고, 가족도 없었으며, 예배 공동체도 보이지 않았고, 주인의 아내가 요구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는 아무도 모르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며, 죄는 결국 하나님께 짓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거룩함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만 깨끗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선택 앞에 설 때가 많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이익, 관계를 이용하는 욕망, 은밀한 거짓말, 마음속에서 키우는 음란과 미움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때 요셉의 고백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유혹을 이기기 위해 그 자리에서 논쟁을 오래 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옷을 잡고 동침하자고 했을 때, 그는 옷을 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떤 유혹은 설득하고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 즉시 피해야 할 대상입니다. 바울도 청년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유혹 앞에서 자기 의지를 과신하지 않고, 피할 길을 선택하는 지혜입니다.
억울한 감옥,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 길
그러나 요셉의 정직한 선택은 당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고 거짓말합니다. 요셉이 남기고 간 옷은 다시 거짓의 증거로 사용됩니다. 한때 그의 채색옷이 형들의 거짓말을 위한 증거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그의 겉옷은 또다시 그를 억울하게 만드는 증거가 됩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넣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배신에서 살아남아 보디발의 집에서 신뢰를 얻었지만, 이제 다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요셉의 정직은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죄를 거절했기 때문에 더 큰 고난을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앙을 단순한 성공 공식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언제나 일이 잘되고, 정직하게 살면 반드시 즉시 보상받는다는 말은 요셉의 이야기와 맞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거절했지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성실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9장 21절은 감옥에서도 같은 사실을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노예의 집에서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감옥에서도 함께하십니다. 요셉이 올라갈 때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더 깊이 내려가는 자리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간수장은 감옥 안의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깁니다. 요셉이 하는 일을 간수장이 살피지 않을 정도로 신뢰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다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가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옥 문을 즉시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요셉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감옥 같은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억울함을 설명할 길이 없고, 기도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며, 내가 바르게 선택했는데 왜 더 어려워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하나님은 감옥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문이 당장 열리는 데만 있지 않고, 닫힌 문 안에서도 우리의 영혼과 믿음을 지키시는 데 있습니다.
잊힌 사람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때
창세기 40장에서 요셉은 감옥에 갇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합니다. 두 사람은 이상한 꿈을 꾸고 근심하지만, 해석할 사람이 없습니다.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자기 재능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임을 고백합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그의 꿈이 회복을 뜻한다고 해석해 줍니다. 그리고 그가 복직되거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부탁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갇힌 사람이 자기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0장 마지막은 매우 쓸쓸하게 끝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요셉은 또 잊힙니다. 형들에게 버림받았고, 아버지에게는 죽은 아들처럼 여겨졌으며, 이제 감옥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에게도 잊힙니다. 바로 다음 장은 “만 이 년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요셉은 이 년을 더 감옥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가장 어려운 시간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보다, 아무 변화도 없는 시간이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했는데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 같고, 내가 드린 수고와 눈물이 헛된 것 같으며,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잊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잊으신 것은 아닙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게 되는 날,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자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조급함보다 늦어 보일 수 있지만, 결코 약속을 놓치지 않습니다.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세우심
창세기 41장에서 바로는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꿈을 꿉니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의 요셉을 기억합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 서서 꿈의 해석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애굽의 가장 강한 권력자 앞에서도 하나님을 높입니다.
요셉은 풍년 칠 년과 흉년 칠 년이 올 것을 해석하고, 풍년의 때에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할 지혜로운 계획을 제안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영이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며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웁니다. 감옥에서 잊혔던 히브리 노예가 하루아침에 애굽의 온 땅을 다스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의 승진은 개인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셔서 많은 생명을 살리게 하십니다. 풍년의 곡식을 저장한 일은 애굽뿐 아니라 가나안과 주변 지역의 사람들을 기근에서 살립니다. 요셉은 꿈을 통하여 자기 가족 위에 높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기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실 때에는 그 사람만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은 구덩이와 노예의 집과 감옥에서 섬김과 행정, 인내와 절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모든 시간은 훗날 그가 큰 권한을 받았을 때 자기 영광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사용하도록 준비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자리, 성공과 영향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나만 안전하고 높아지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물질, 경험과 지혜는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약한 사람을 돕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형제들의 악과 하나님의 선한 섭리
기근이 심해지자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 곡식을 사러 옵니다. 그들은 요셉 앞에 엎드립니다. 오래전 요셉이 꾸었던 꿈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즉시 자신을 알리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형들의 마음을 살피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며, 유다가 동생을 대신하여 자신을 종으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봅니다.
마침내 요셉은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밝힙니다. 그는 울며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라고 말합니다. 형들은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이 팔아넘긴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들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셉은 충분히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어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형들의 죄를 가볍게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형들은 실제로 요셉을 미워했고, 노예로 팔았으며, 아버지를 오랫동안 속였습니다. 그들의 악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형들의 죄를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넘어 더 큰 선을 이루셨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이 진리를 가장 분명하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같은 사건 안에 두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형들은 악을 계획했고, 하나님은 그 악을 통하여 생명을 살리는 선한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당신이 당한 일도 사실은 좋은 일이었다”고 말하게 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배신은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도 요셉에게 아프지 않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보다 더 크며, 가장 어두운 사건에서도 선한 목적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고난의 모든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요셉처럼 이 땅에서 모든 이유를 확인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과 상처를 헛되게 버리지 않으시며, 악이 마지막 말을 하도록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복수 대신 돌봄을 선택한 사람
야곱이 죽은 뒤 요셉의 형들은 다시 두려워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요셉이 자신들을 용서한 척했지만, 이제는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아버지가 용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합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웁니다.
요셉의 눈물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형들이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는 슬픔, 오랜 상처가 다시 떠오르는 아픔, 그리고 자신이 진심으로 용서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나는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요셉의 용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최종 재판관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형들의 죄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았지만, 하나님 자리에 앉아 복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그 믿음으로 보복의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로만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돌봅니다. 성경은 요셉이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고 기록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과거의 악을 미화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악이 현재의 관계를 계속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깊은 배신과 상처를 경험한 사람에게 용서를 가볍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잘못을 부정하거나, 위험한 관계로 무조건 돌아가거나, 필요한 책임을 묻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안전한 거리와 법적·공동체적 책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최종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길을 배워 갑니다.
요셉보다 크신 그리스도, 버림받아 생명을 주신 분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동일하게 예언하는 본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요셉의 삶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여러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이었지만 형제들에게 미움받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은 몇 개에 팔렸고, 낮아짐과 고난을 지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자기 백성에게 배척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음을 통해 죄와 죽음 아래 있던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기근에서 사람들을 살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돌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요셉의 삶은 고난을 지나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 그 섭리는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맺음말|내려가는 길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요셉의 인생은 꿈과 구덩이와 감옥을 지나간 길입니다. 그가 본 꿈은 오랜 시간 현실과 너무 멀어 보였습니다. 그는 구덩이에서 살려 달라고 외쳤을 수 있고, 노예의 집에서 고향을 그리워했을 수 있으며, 감옥에서 자신을 잊은 사람을 생각하며 깊이 낙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덩이 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구덩이 아래에도 계셨습니다. 주인의 집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감옥에도 계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혹시 지금 인생이 내려가는 길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애써 온 일이 무너지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억울한 일을 겪으며, 기도했지만 오랜 기다림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요셉의 하나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우리의 눈물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길의 모든 이유를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붙들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도, 억울한 누명도, 긴 감옥의 시간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끝내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낮은 자리에서 빚으시고, 때가 되면 그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꿈이 구덩이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기 바랍니다. 감옥 문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하여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며,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게 하실 것을 소망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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