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어떻게 악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까?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어떻게 악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까?
이 질문은 기독교 인간론과 악의 기원을 다룰 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면 인간 안에는 악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악이 없던 인간이 어떻게 악을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었는지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악하게 만들었거나 인간 안에 죄를 심어 두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강요를 받아 죄를 지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변할 수 있는 피조물이었으며 자유로운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합니다. 최초의 인간에게는 죄와 도덕적 부패가 없었습니다. 지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았고, 감정은 선한 것을 사랑했으며,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몸과 영혼,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시며 악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외부에서 주어진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입니다.
반면 인간의 선함은 창조주께 받은 선함입니다.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피조물이었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 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스스로 존재하거나 자기 안에 독립된 선의 근원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창조의 선함과 영화의 완전함은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아직 시험을 통과하여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순종할 가능성과 불순종할 가능성이 모두 있었습니다.
고전적인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왔습니다.
타락 이전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중생한 성도는 성령의 은혜로 죄와 싸우며 선을 행할 수 있지만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영화롭게 된 성도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타락 전 인간은 포세 페카레(posse peccare), 곧 ‘죄를 지을 수 있음’과 포세 논 페카레(posse non peccare), 곧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음’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논 포세 페카레(non posse peccare), 곧 ‘죄를 지을 수 없음’의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에덴의 선함은 완성된 천국의 선함과 같지 않습니다. 에덴은 선한 출발점이었지만,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성숙해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다면 완전한 창조가 아닌 것입니까?
‘완전하다’는 말은 존재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새가 물속에서 살 수 없다고 해서 불완전한 새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불변하지 않다고 해서 창조에 결함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을 지닌 피조물로서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성장과 선택, 사랑과 순종도 변화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문제는 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그 가능성을 하나님을 떠나는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실제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인간이 다른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는 기계였다면 순종은 도덕적 사랑이라기보다 프로그램의 작동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자유의지가 죄를 만들어 냈습니까?
자유의지는 죄의 물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독립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고전적 기독교 신학은 악을 선의 결핍 또는 부패라고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프리바티오 보니(privatio boni), 곧 ‘선의 결여’라고 불렀습니다.
썩음은 그 자체로 독립된 물질이 아니라 본래 좋았던 것이 부패한 상태입니다. 어둠도 빛과 대등한 독립적 실체라기보다 빛의 부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님께서 별도로 창조하신 악한 물질이 아니라, 선하게 창조된 의지가 마땅히 향해야 할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왜곡입니다.
인간의 사랑하는 능력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그 능력을 왜곡했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것도 선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무관하게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려 한 것은 교만이었습니다. 먹는 행위도 선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금지된 열매를 먹은 것은 불순종이었습니다.
죄는 새로운 능력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선한 능력을 잘못된 대상과 방향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인간은 왜 하나님보다 뱀의 말을 믿었습니까?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나님을 직접 부정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유혹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제한하고 있다는 의심을 심었습니다.
죄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모든 것보다 금지하신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선을 누리는 대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역설입니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는데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미 받은 존귀함을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신적 자율성을 얻으려 했습니다.
뱀은 유혹했지만 강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외부의 유혹은 죄를 지을 기회를 제공했지만, 죄의 도덕적 책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악한 욕망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여기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는 죄가 없었다면 어떻게 최초의 악한 욕망이 생겼습니까? 악한 본성이 없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선택했습니까?
성경은 유혹의 과정과 인간의 책임은 보여 주지만, 무죄한 의지 안에서 최초의 악한 선택이 발생한 심리적·형이상학적 과정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죄는 합리적인 원인을 가진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에 충분하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인간은 그 이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은 것이 되고, 도덕적 책임이 약화됩니다. 반대로 죄는 선한 이유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죄를 완전히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순간 죄가 정당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불법의 신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죄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과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선한 피조물이 왜 최초로 선을 떠났는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악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돌려서도 안 되고, 악을 하나님과 대등한 영원한 원리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지점에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게 창조하셨고, 피조물은 자발적으로 그 선을 떠났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악해졌습니까?
인간의 타락을 설명할 때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했다면 사탄은 어떻게 악해졌습니까? 성경은 사탄도 본래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과 대등한 악의 신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사탄도 처음부터 악한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일부 성경 본문은 교만으로 타락한 영적 존재를 암시하지만, 사탄의 최초 타락 과정을 시간순으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은 마귀가 교만으로 정죄에 빠졌음을 시사하고,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범죄한 천사들을 언급합니다.
천사들 역시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변할 수 있는 피조물이었고, 일부가 하나님을 떠나 반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악한 선택이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신비는 남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타락할 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세상이 창조된 뒤 급히 마련된 임시대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고도 창조하셨으니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을 허용하셨지만 죄를 명령하거나 인간에게 악한 욕망을 넣어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일을 미리 아는 것과 그 일을 직접 행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예측보다 훨씬 완전하기 때문에 이 설명만으로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죄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허용하시면서도 죄의 조성자가 아니며, 피조물이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진다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에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시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피조물의 의지가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두 진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조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성경은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타락을 허용하셨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 모든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면서도 악을 자신의 더 큰 구원 목적 아래 두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 때보다 더 깊은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거룩함과 자비가 함께 드러났습니다. 구속받은 성도는 단지 죄가 없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는 타락하지 않는 영광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이유로 타락 자체를 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일은 악했고, 십자가형은 불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으시면서도 악이 마지막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자유가 있다면 천국에서도 다시 타락할 수 있습니까?
천국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면 자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악과 선 사이에서 언제나 흔들리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의 본성과 가장 깊은 선에 따라 기쁘게 행동하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거나 악을 행하실 수 없지만 자유롭지 않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는 완전한 거룩함과 일치합니다. 영화롭게 된 성도도 하나님을 분명히 보고 그분의 선하심을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현재 우리는 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죄를 종살이라고 부릅니다. 중독된 사람이 중독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고 해서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천국의 상태는 자유의 상실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구속받은 성도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므로 다시 타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최종 안전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강해지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시는 은혜에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둘째 아담이 승리하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순종했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 했으나,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담보다 더 강한 자유의지를 갖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의가 되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아담이 실패했으니 당신은 더 잘해야 한다”는 도덕적 권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며,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선의 근원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선하게 창조되었는데 어떻게 악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죄가 없이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처럼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선함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유지되는 피조물의 선함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는 변화 가능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별도의 물질이 아니라, 선하게 창조된 의지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결핍과 왜곡입니다. 인간은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불신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왜 무죄한 의지가 최초로 하나님을 떠났는지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죄악의 신비로 남습니다. 성경은 그 어둠을 모두 해명하기보다 책임이 인간에게 있으며,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고, 그리스도께서 타락을 이기고 구원의 길을 여셨다고 선포합니다.
인간의 첫 선택은 타락으로 끝났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새 창조입니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더 안전하고 영화로운 생명으로 회복됩니다. 성도의 소망은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심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