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도 하나님이신가요?
성령님도 하나님이신가요? 그런데 왜 “성령님을 믿으세요”라고는 잘 말하지 않을까요?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믿으세요”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낯설게 들립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하나님보다 낮은 분인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혹은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나 감정적 체험을 뜻하는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어떤 힘이나 분위기,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종교적 열정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원히 계시는 참 하나님이시며,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이끄시며 위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성령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어 두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며, 성도를 아버지 하나님께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할 때, 그 말은 성령님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사역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전기나 바람처럼 비인격적인 힘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성령님 자신을 단순한 능력으로 축소하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안디옥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3:2). 성령님은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교회를 인도하시며(행 16:6-7),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롬 8:26-27). 또한 성령님은 근심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엡 4:30).
말하고, 가르치고, 뜻을 가지고, 사랑하며, 근심하고, 중보하시는 분을 단순한 힘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여기서 인격이라는 말은 인간처럼 육체를 지니셨다는 뜻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와 관계성을 지닌 주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생기는 어떤 감정의 이름이 아닙니다. 기도 중에 느끼는 평안, 예배 중의 감동, 말씀을 들을 때의 찔림은 성령님의 역사와 관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이 강하다고 반드시 성령의 역사인 것은 아니며, 감동이 약하다고 성령님이 떠나신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감정에 갇히지 않으시고, 말씀과 복음과 거룩한 삶을 통하여 꾸준히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성령님의 신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는 사도행전 5장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문제로 거짓말했을 때,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행 5:3-4). 성령을 속이는 일이 곧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일로 설명됩니다.
성령님에게는 하나님께만 속한 성품도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11절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속을 그 사람의 영 외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속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알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성령님이 하나님 외부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본질을 아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영을 피하여 어디로 가며, 하나님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겠느냐고 고백합니다(시 139:7). 성령님은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시며,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전지하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생명을 주십니다. 이러한 속성은 피조물에게 속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속합니다.
또한 성도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립니다(고전 3:16). 성령님이 성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어떤 익명의 영향력이나 천사가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성자·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서로 구별되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한 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합니다. 하나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따로 존재하는 세 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아버지였다가, 때에 따라 예수님이었다가, 또 때에 따라 성령으로 모습을 바꾸는 한 인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설명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자는 물에서 올라오시고,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시며,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들립니다(마 3:16-1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실제로 구별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마 28:19). 여기서 “이름”은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형으로 사용됩니다. 세 위격이 언급되지만 하나의 신적 이름, 곧 한 분 하나님의 이름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성부보다 낮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보다 덜 신적인 분도 아닙니다.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는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논리로 완전히 해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교회가 지켜 온 정통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을 잘 듣지 못한다고 해서, 교회가 성령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가운데 자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분명히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분의 사역과 임재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부와 성자만 하나님으로 믿고 성령님을 부차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의 증언을 따라 성령님의 신성을 고백했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는 성령님을 주님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이는 성령님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생명과 구원의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믿는다”는 말은 충분히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표현입니다. 다만 일상적인 전도와 설교에서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는 데에는 복음의 역사적 중심과 성령님의 고유한 사역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 교회는 특별히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할까요?
성경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에게는 죄 사함과 화해가 필요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참된 인간의 몸과 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사랑의 본보기가 아니라, 죄인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신 대속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답했습니다(행 16:30-31). 이는 성령님을 배제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의 초청은, 성령님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자체가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시작되며, 성령님은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하십니다.
성령님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성령님을 믿으라는 표현이 상대적으로 적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이유는 성령님의 사역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영화롭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오시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26). 또 성령님이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시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13-14).
성령님은 자신을 낮추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 안에서 성령님은 죄인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실제적인 구원의 은혜로 적용하십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을 보내셨으며, 성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하십니다. 이것은 세 분 하나님이 서로 다른 일을 따로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의 뜻과 하나의 구원 사역 안에서 일하십니다. 다만 성부·성자·성령의 인격적 구별에 따라 구원의 사역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설교와 예배는 사람을 성령님 자신의 체험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은 특별한 체험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성도는 성령님을 믿는다면 방언, 강한 감정, 특별한 환상, 즉각적인 치유와 같은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놀라운 성령의 은사와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유롭게 자신의 뜻대로 은사를 주시고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무시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은사가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병 고치는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어떤 한 체험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성경의 풍성함을 좁히는 일입니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전통은 모든 참된 신자가 회심할 때 성령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롬 8:9). 또한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2:13). 따라서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라면 성령님이 전혀 계시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 충만은 반복하여 구해야 할 삶의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성령님을 더 많이 소유하라는 말이라기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관계와 선택을 더 깊이 다스리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확실한 열매는 일시적 흥분보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23).
정통교회 안에는 성령 체험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신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방언과 은사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복음주의 안에서도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순절·은사주의 전통에서는 회심 이후에 성령세례 혹은 성령의 능력 부으심을 특별히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더 강하게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전통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동성과 선교적 능력을 소중히 붙듭니다. 반면 개혁주의와 많은 복음주의 전통은 성령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회심의 은혜로 이해하며, 모든 성도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봅니다.
이 차이를 다룰 때에는 서로를 쉽게 정죄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체험을 구원의 증거나 성도의 우열을 가르는 절대 기준으로 삼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를 귀히 여기면서도, 사랑과 진리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더 큰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어떻게 반응하고 기도해야 할까요?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므로, 성령님께 경배와 신뢰를 드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밝히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보통 성부 하나님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드려집니다. 이것은 성령님께 직접 기도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아닙니다. 성령님도 참 하나님이시므로 성령님께 드리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 나타나는 기도의 기본적인 흐름은 아버지께 나아가되, 아들의 공로를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믿는 실제적인 길은 특별한 말이나 감정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 이 말씀으로 저를 비추어 주십시오”라고 구하십시오. 유혹을 받을 때 “제 힘으로 이기려 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죽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예배와 교회생활 속에서 내 감정보다 말씀의 진리를 우선하고, 사랑과 절제와 순종의 열매를 구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를 자기 과시에 빠지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성부나 성자보다 낮은 분도 아니고, 이름 없는 능력이나 일시적 감정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실제로 적용하시는 인격적인 주님이십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더 자주 말하는 것은 성령님을 제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믿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령님의 신성과 사역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 아래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관하여 궁금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하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를 배웁니다. 성부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이루시며, 성령께서 그 은혜를 우리 마음에 새기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예배하는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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