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로뎀나무 아래에서 다시 시작된 길
엘리야, 로뎀나무 아래에서 다시 시작된 길
- 열왕기상 19:1-18
함께 읽을 말씀: 열왕기상 19:19-21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가뭄과 우상숭배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났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엘리야는 가장 높은 승리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은 그 승리의 다음 날,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세벨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행한 일을 듣고, 다음 날 이맘때에는 반드시 엘리야의 생명을 끊겠다고 위협합니다. 갈멜산에서 수많은 선지자 앞에 섰던 엘리야가, 한 사람의 위협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는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로 들어가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 말은 승리한 선지자의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지치고 낙심한 한 사람의 신음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헛된 것처럼 느꼈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지 않았으며, 자신은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정죄하며 만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를 재우시고, 떡과 물을 주시며, 다시 잠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호렙산까지 걸어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먼저 “더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쉬게 하시고 먹이시며, 그 영혼이 다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엘리야의 로뎀나무 아래는 실패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친 종을 다시 일으키시는 자리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갈멜산의 승리보다 로뎀나무 아래의 지침을 더 잘 압니다. 열심히 일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책임을 감당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쉼과 말씀과 새 사명으로 다시 길을 걷게 하십니다.
갈멜산의 승리 뒤에 찾아온 깊은 탈진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단지 한 번의 설교를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가뭄의 시대를 견뎠고, 아합 왕과 이세벨의 통치 아래 우상숭배가 퍼지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릿 시냇가에 숨었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했으며, 갈멜산에서 혼자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명이 있는 우상숭배 체제와 맞섰습니다.
갈멜산의 사건은 엘리야에게 엄청난 영적·정서적 긴장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편에 섰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를 기도했으며, 가뭄 끝의 비를 기다리며 갈멜산 꼭대기에서 일곱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 뒤에는 아합의 병거보다 앞서 이스르엘까지 달려갑니다.
큰 사역이나 긴장된 일을 마친 뒤에는 몸과 마음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큰 승리 뒤에는 늘 기쁨과 활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긴장이 풀린 뒤 깊은 피로와 공허, 낙심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했던 집회나 사역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연약한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을 들었을 때 도망한 것은 그가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지쳐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홀로 감당해 온 책임과 긴장, 기대와 실망이 한꺼번에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갈멜산에서 불이 내렸다고 해서 이세벨의 마음이 즉시 돌이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아마도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면 이스라엘 전체가 곧 회개하고, 우상숭배가 끝날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완고했고, 이세벨은 더 강한 위협으로 응답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한 뒤에, 현실이 즉시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볼 때 낙심할 수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문제의 뿌리가 남아 있고, 열심히 섬겼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며, 큰 은혜를 경험한 뒤에도 일상은 여전히 힘들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이제 충분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탈진을 보시고, 그 상태를 단순한 영적 실패라고 규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몸과 마음이 먼저 회복되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한 선지자
엘리야는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하루 길쯤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합니다. 로뎀나무는 광야에서 드문 그늘을 제공하는 관목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 아래는 엘리야에게 안식의 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자리였습니다.
그는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깊은 자기 실망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국 조상들의 시대와 다르지 않은 현실을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바알 숭배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여전히 이세벨의 위협 아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엘리야의 고백은 믿음 없는 사람의 말이라기보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쏟아 놓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명을 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여”라고 부르며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의 탄식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탄식을 감추지 않습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자기 혼자 백성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호소했고, 욥도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할 만큼 깊은 고통을 겪었으며, 예레미야도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며 낙심했습니다. 시편 기자들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낙심과 무기력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고통은 영혼의 문제만이 아니라, 몸의 피로와 수면 부족, 오래된 상실, 관계의 상처,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함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친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쉬며,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곁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반복되거나 자신을 해칠 위험이 느껴질 때에는, 이를 영적인 문제로만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가까운 가족과 목회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즉시 알리고, 정신건강 전문가나 응급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는 분이시며,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 아니라 생명을 귀히 여기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엘리야를 재우시고 먹이셨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잠들었을 때,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습니다. 그는 먹고 마신 뒤 다시 눕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천사를 보내어 “일어나서 먹으라. 네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아주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먼저 엘리야에게 사명을 다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책망하며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잠들게 하시고, 먹이시고, 다시 쉬게 하십니다.
영혼의 회복에는 때로 설교보다 잠이 먼저 필요하고, 깊은 권면보다 한 끼의 식사가 먼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몸이 극도로 지치면 마음도 약해지고, 마음이 무너지면 기도와 말씀을 붙들 힘도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온 존재로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떡과 물은 엘리야에게 단지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는 아직 끝난 사람이 아니다. 네게는 아직 갈 길이 있다. 내가 네 생명을 돌보고 있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엘리야는 죽기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리기 위해 먹이십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직 걸어갈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지칠 때 자신을 돌보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충분히 쉬고, 몸을 돌보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상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과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쉼이 필요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호렙산으로 향한 사십 일의 길
엘리야는 그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호렙은 시내산과 연결되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셨던 산입니다. 엘리야가 호렙으로 가는 것은 단순한 피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원, 언약의 산으로 돌아갑니다.
모세도 호렙산의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엘리야가 사십 일 동안 광야를 걸어 호렙에 이르는 모습은, 모세와 출애굽의 광야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시대에, 엘리야는 언약의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단지 편안하게 쉬게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언약의 자리로 다시 이끄십니다. 참된 회복은 몸의 휴식에서 시작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 안에서 새 방향을 얻을 때 더 깊어집니다. 우리는 지칠 때 쉬어야 하지만, 쉼만으로 삶의 방향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말씀 앞으로 부르시고,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기억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의 한 굴에 들어가 머뭅니다. 아마 그는 여전히 두려움과 낙심을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를 사십 일이나 걸었지만, 마음속 질문이 저절로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호렙의 굴 속에 있는 엘리야에게 찾아오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위치를 몰라서 물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엘리야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말하도록 여는 질문입니다. “너는 왜 이곳에 왔느냐. 무엇이 너를 이토록 지치게 했느냐.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을 내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헐며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고, 자신만 남았는데 그들이 자기 생명도 찾아 빼앗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엘리야의 말에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버렸고, 바알 숭배가 퍼졌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박해받았습니다. 엘리야가 느끼는 외로움과 위협은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야는 지나치게 좁아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오바댜를 통해 선지자 백 명을 숨겨 보호하셨고,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친 사람은 현실을 왜곡해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두운 부분이 너무 크게 보이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실패와 위협, 상실과 외로움이 마음을 덮으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자리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남아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탄식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나만 남았다”는 생각에 갇혀 있지 않도록 새로운 시야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맡기지 않으셨고, 그를 홀로 두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의 열심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충성된 사람들을 남겨 두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 그리고 세미한 침묵의 소리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굴에서 나와 산 위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뒤에 지진이 일어나지만 여호와께서는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뒤에 불이 있지만 여호와께서는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매우 독특합니다. 문자적으로는 ‘가늘고 고요한 침묵의 소리’라고도 옮길 수 있습니다. 익숙한 번역인 ‘세미한 소리’나 ‘작고 부드러운 소리’는 하나님이 큰 소리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을 잘 전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바람과 지진과 불 같은 강력한 현상 속에서는 결코 일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 자연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가 기대한 방식으로만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승리와 강력한 현상만이 아니라, 조용한 말씀과 침묵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만나십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을 보았습니다. 그는 어쩌면 또 다른 큰 불, 더 큰 심판,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방식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눈에 띄는 승리와 거대한 사건만으로 전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조용한 회개, 작은 순종, 말씀을 붙드는 남은 자들의 삶, 다음 세대를 세우는 기다림 속에서 자랍니다.
우리도 큰 응답만 은혜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병이 즉시 낫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변화되는 사건만 하나님의 역사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용한 기도와 작은 섬김, 매일의 말씀 묵상과 눈에 띄지 않는 충성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란 가운데서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잠잠히 귀를 기울일 때 들려오는 말씀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를 들었을 때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어귀에 섭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지친 사람의 회복은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서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으며, 하나님의 시선으로 현실을 다시 보는 데 있습니다.
새 사명, 새 동역자, 남겨 두신 칠천 명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엘리야는 처음과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자신이 열심을 냈고,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렸으며, 자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으시지만, 거기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길을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메섹 광야로 돌아가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엘리사와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자신의 사역이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은 역사를 다스리실 도구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보존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이 실패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목회자나 지도자, 어떤 사역자도 하나님의 나라를 혼자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시고, 다른 세대를 준비하시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충성된 사람들을 일으키십니다. 이 사실은 지친 사역자와 성도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 이하에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납니다. 엘리사는 열두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었고, 엘리야는 그 곁을 지나며 자신의 겉옷을 그에게 던집니다. 이는 선지자적 사명의 계승을 상징하는 행동입니다. 엘리사는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를 잡아 그 기구의 나무로 삶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엘리야는 혼자 남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엘리사를 동역자이자 후계자로 붙여 주십니다. 엘리야의 사명은 그의 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단지 다시 일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걸을 사람을 붙여 주시고, 다음 세대를 세우게 하시며, 사명의 짐을 나누게 하십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배우는 회복의 길
엘리야의 회복은 한 번의 강한 말씀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쉼을 주시고, 음식을 주시고, 긴 걸음을 걷게 하시며, 호렙산에서 말씀을 들려주시고, 새로운 사명과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이 흐름은 지친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하나님은 몸을 돌보십니다. 잠과 음식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지친 상태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거나 자신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먼저 쉬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엘리야의 말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지만, 엘리야가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말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도 마음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화와 슬픔, 실망과 두려움을 경건한 말로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엘리야의 시야를 넓히십니다. 엘리야는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지친 마음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돕고, 우리가 보지 못한 은혜의 사람들을 곁에 두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회복은 과거의 자리로 억지로 돌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전과 똑같은 방식만 반복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사람을 세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더 넓게 이어지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침을 통과시켜 더 겸손하고 더 깊은 사명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엘리야보다 크신 그리스도, 지친 자를 품으시는 주님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은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두려워했고, 불을 구한 선지자였지만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지만 자신만 남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지 않고 위로합니다. 하나님은 강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의 연약함을 아시며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사역의 분주함 가운데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 지친 제자들에게 따로 와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신에게 오라고 초청하시며, 그들에게 쉼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의 잔을 앞에 두고 깊은 고뇌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지친 영혼을 품으시고 다시 일으키시는 참된 구주이십니다.
맺음말|지친 자리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길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을 보았지만, 로뎀나무 아래에서는 죽기를 구했습니다. 이 두 모습은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지칠 수 있고, 큰 사역 뒤에 무너질 수 있으며,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를 재우시고 먹이셨으며, 호렙산까지 걸어갈 힘을 주셨습니다. 큰 바람과 지진과 불 뒤에 들려오는 세미한 소리로 그를 만나셨고, 엘리야가 보지 못한 칠천 명을 보여 주셨으며, 엘리사라는 새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혹시 지금 로뎀나무 아래처럼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고, 더 걸어갈 힘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자신을 너무 빨리 정죄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로를 아시고,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며, 먼저 쉬게 하시고 다시 먹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아직 남겨 두신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동역자가 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사명이 있으며,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친 자리에서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그분이 주시는 쉼과 말씀과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를 끝내지 않으시고, 새로운 길로 다시 보내신 신실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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