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과 나오미,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길

 

룻과 나오미,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길

룻기 1:1-22

함께 읽을 말씀: 룻기 2:1-23; 4:13-17

룻기는 큰 전쟁이나 왕의 즉위식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 가정의 배고픔과 이주, 남편의 죽음과 아들들의 죽음, 그리고 두 과부의 눈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에 사사가 다스리던 시대, 곧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혼란의 시대에,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도 기근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이름 그대로 ‘떡집’이라는 뜻을 지닌 곳입니다. 그런데 떡집에 떡이 없습니다. 먹을 것이 풍성해야 할 땅에 기근이 들고, 한 가정은 고향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합니다. 그 길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길이었겠지만, 나오미에게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는 길이 되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 죽습니다. 나오미 곁에는 며느리 룻과 오르바만 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과부의 삶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위태로웠습니다. 생계와 보호, 사회적 지위가 가족의 남성 구성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시대에,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삶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상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고향과 친족과 신들을 뒤로하고 시어머니를 따라갑니다. 그는 앞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자신을 환영할 사람이 있을지, 먹고 살 길이 있을지, 자신이 낯선 이방 여인으로 어떤 대우를 받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 길을 선택합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귀향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실에서 회복으로, 쓰라림에서 은혜로, 낯선 이방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빈손으로 돌아온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룻을 통하여 그의 곁에 이미 은혜를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가 빈손이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선물을 곁에 두고 계실 수 있습니다.

떡집에 찾아온 기근, 떠나야 했던 한 가족

룻기 1장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의 영적·도덕적 혼란이 깊었던 시대입니다. 사사기 마지막은 그 시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욕망과 판단이 앞섰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의 한 사람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갑니다. 모압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이방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는 복잡하고 때로 긴장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멜렉의 가족이 모압으로 떠난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낯선 문화와 낯선 신들 가운데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엘리멜렉의 선택을 직접 정죄하지 않습니다. 기근은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이었고, 가족은 먹을 것을 찾아 움직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려움과 이주, 생계의 선택을 쉽게 믿음 없음의 결과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고난의 원인을 언제나 개인의 죄와 연결하지 않습니다.

모압에 머무는 동안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약 십 년쯤 지났을 때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룻기 1장 5절은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짧지만 참으로 무겁습니다. 나오미는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입니다.

때로 인생은 한 번의 상실로 끝나지 않고, 상실이 겹쳐서 찾아옵니다. 하나를 견딜 틈도 없이 또 다른 슬픔이 오고,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삶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느꼈을 공허와 두려움은 쉽게 짐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의 상실을 설명으로 덮지 않고, 그가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조용히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상실을 겪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눈물의 현실을 지우지 않습니다. 믿음은 아프지 않은 척하는 태도가 아니라, 아픔을 안고도 하나님 앞에 서는 길입니다.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 은혜의 시작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베들레헴에 다시 떡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떡집에 다시 떡이 생겼고, 기근의 땅에 하나님의 돌보심이 임했다는 소식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에서 돌아오려고 길을 떠납니다.

룻기 1장에는 “돌아가다”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고, 그는 며느리들에게 각기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오르바는 결국 자기 백성과 신들에게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를 따라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돌아감은 단순히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그는 며느리들이 죽은 이들과 자신에게 선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선대하다”라는 말에는 룻기의 중심 주제인 헤세드, 곧 언약적 사랑과 신실한 인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곁에 며느리들을 붙들어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 젊은 여인에게 모압으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아들이 없고, 그들에게 줄 미래도 없다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말에는 깊은 슬픔이 있지만, 동시에 며느리들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그들의 미래를 붙잡지 않습니다.

오르바는 울며 나오미에게 입 맞춘 뒤 자기 백성과 신들에게 돌아갑니다. 오르바의 선택을 믿음 없는 배신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오미가 권한 현실적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고향과 익숙한 관계, 자신이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룻기의 아름다움은 오르바를 낮추는 데 있지 않고, 룻이 선택한 믿음과 사랑의 길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오미는 룻에게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다시 권합니다. 그때 룻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깊은 고백 가운데 하나를 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의 고백은 단지 시어머니를 향한 효성이나 의리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땅, 자신의 친족, 자신의 문화와 신들을 떠나 나오미의 백성과 하나님께로 들어갑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갔던 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룻은 모든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새 길을 선택합니다.

룻은 나오미가 죽는 곳에서 자신도 죽고 거기에 묻히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는 감정적인 순간의 약속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건 언약적 결단입니다. 그는 나오미를 따라 잠시 베들레헴까지 동행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오미의 삶과 죽음, 백성과 하나님을 자신의 삶과 죽음의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이방 여인 룻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가 혈통과 출신의 경계를 넘어 역사함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좁은 소유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고 그분의 날개 아래 피하는 모든 이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안에 들어옵니다.

교회는 룻의 이야기를 통하여 낯선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쉽게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 여인 룻을 받아 주셨고, 그를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혈연과 출신, 경제적 형편, 문화적 차이보다 앞서 하나님의 은혜로 한 가족이 된 공동체여야 합니다.

룻의 결단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편안한 때에만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머물기를 선택하는가? 믿음은 모든 결과가 보장되었기에 선택하는 길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낯선 미래 속에서도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길입니다.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거늘”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썩해집니다. 사람들은 “이가 나오미냐”라고 묻습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기쁨’ 혹은 ‘즐거움’을 뜻하는 이름이고, 마라는 ‘쓰라림’을 뜻합니다.

나오미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쓰라림의 언어로 해석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그에게 베들레헴으로의 귀향은 기쁜 귀환이 아니라, 상실을 안고 돌아온 길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들을 때 우리는 나오미를 쉽게 꾸짖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여전히 부르며, 전능자 앞에서 자기 아픔을 토로합니다. 그의 말에는 신앙의 질문과 탄식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나오미의 탄식을 침묵시키지 않습니다. 욥도 자신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질문했고,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께 언제까지냐고 울부짖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쓰라린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까지 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나오미가 보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그의 곁에는 룻이 서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가장 귀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은혜의 사람입니다.

물론 룻 한 사람이 남편과 두 아들의 빈자리를 단순히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실을 지워 버리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슬픔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빈손이라고 느끼는 사람의 곁에, 아직 보지 못한 은혜의 씨앗을 두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너무 어두워서 보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보리 추수의 시작, 일상 속에 숨은 섭리

룻기 1장 마지막은 나오미와 룻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이 한 문장은 조용하지만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기근 때문에 떠났던 베들레헴에 이제 보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추수의 계절에 그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종종 거대한 기적보다 일상의 계절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비가 내리고, 보리가 자라고, 사람들이 밭에서 곡식을 거두는 평범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생명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룻기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나 눈에 띄는 기적을 많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전체에는 하나님의 조용하고 신실한 손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합니다. 이삭 줍기는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와 과부를 위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한 제도였습니다. 레위기와 신명기는 밭의 곡식을 다 거두지 말고, 밭에 남은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그네가 주울 수 있도록 남겨 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예배당 안의 의식만 다루는 말씀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적 사랑의 질서이기도 했습니다.

룻은 부끄러움에 주저앉지 않고 밭으로 나갑니다. 그는 이방 여인이고 과부였으며, 베들레헴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믿음은 하늘만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은 오늘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합니다.

룻기 2장 3절은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독자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우연을 이끌고 있음을 봅니다. 룻은 보아스를 찾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 밭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발걸음을 은혜의 밭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과 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기회를 얻으며, 예상하지 못한 도움을 받고, 평범한 하루가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즉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삶의 우연 너머에서 조용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밭, 은혜가 제도가 되는 자리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이며 유력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밭에 와서 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하고, 일꾼들도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답합니다. 보아스의 밭은 단지 곡식을 생산하는 경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축복이 오가는 공동체의 자리로 묘사됩니다.

보아스는 낯선 여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습니다. 관리인은 그가 모압 지방에서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모압 소녀이며, 아침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이삭을 줍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머물며, 자기 여종들과 함께 있으라고 말합니다. 또한 젊은 남자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고, 목이 마르면 일꾼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당시 룻의 처지를 생각하면 놀라운 배려입니다. 이방 여인이자 가난한 과부인 룻은 밭에서 무시당하거나 위험한 일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를 보호하고 먹이며, 사람들 가운데 안전하게 머물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막연한 감정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안전을 지키고, 먹을 것을 나누며, 약한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룻은 보아스 앞에 엎드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자신이 낯선 사람임을 압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 곧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 온 일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은 단지 나오미의 곁을 지킨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쓰라림을 넘어 새 생명으로

룻기 4장은 보아스가 성문에서 가까운 친족과 장로들 앞에 서서 나오미의 기업 무를 일과 룻과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보아스는 책임을 피하지 않고, 공동체 앞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룻과 나오미를 보호합니다. 그는 단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과 미래를 내어놓아 두 과부의 삶을 회복시키는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고,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입니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이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다윗 왕의 계보로 이어집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웃 여인들이 “아들이 나오미에게 태어났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오벳은 룻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상실로 비어 있던 나오미의 삶에 새 생명과 미래를 가져다주는 은혜의 선물이 됩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불립니다. 아들을 잃었던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룻을 통하여 새로운 가족과 소망을 주십니다.

나오미는 처음에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때 그는 아기를 품에 안습니다. 그는 마라, 쓰라린 사람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삶을 쓰라림에서 끝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가 잃은 남편과 두 아들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실의 자리에도 새로운 생명을 심으시고, 눈물의 역사 속에 미래를 열어 가십니다.

룻보다 크신 은혜,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길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속에 룻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이방 여인, 과부, 가난한 이삭 줍는 여인이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경계보다 훨씬 넓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룻을 모압 여인이라고 불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윗의 가문과 메시아의 계보 안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밀어낸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를 위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도 궁극적인 구원자는 아닙니다. 그는 장차 오실 참된 구속자를 가리키는 한 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는 참된 구속자이십니다. 그분은 멀리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분이 아니라, 친히 우리의 자리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신 분입니다.

룻은 낯선 땅에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리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향해 자신에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높고 낮은 자의 벽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맺음말|빈손의 길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는 사람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자신을 빈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남편도,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그의 삶은 쓰라림으로 가득해 보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다고 느꼈습니다. 성경은 그의 탄식을 꾸짖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실한 사람의 눈물을 들으시고, 그 쓰라린 고백을 품으십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보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룻이 있었습니다. 낯선 미래를 향해 시어머니를 따라온 모압 여인,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믿음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룻을 통하여 나오미의 삶에 새 생명과 새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어떤 때에는 빈손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크고, 지나온 길이 너무 쓰라리며, 앞으로 무엇이 남아 있는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 억지로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오미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쓰라림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은혜의 씨앗을 심고 계실 수 있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보리밭을 준비하시고, 뜻밖의 만남을 예비하시며, 우리 곁에 남겨 두신 사랑의 사람을 통하여 다시 살아갈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상실이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낯선 미래를 향해 믿음의 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룻처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머물기를 선택하고, 나오미처럼 쓰라린 마음도 하나님께 아뢰며, 보아스처럼 우리 곁의 약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은혜를 베풀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두 과부의 길을 통하여, 다윗과 그리스도에게 이어지는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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