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복 나루에서 절뚝이게 된 사람
얍복 나루에서 절뚝이게 된 사람
창세기 32:22-32
함께 읽을 말씀: 창세기 33:1-11; 호세아 12:3-5
야곱은 벧엘에서 도망자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낯을 피해 고향을 떠났고, 돌을 베개 삼은 외로운 밤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약속은 야곱에게 고난 없는 인생을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오랜 노동과 가정의 갈등, 사랑과 상실의 세월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약 이십 년이 흐른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 고향은 형 에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형을 속였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으며,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묻어 두었던 죄와 상처,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32장은 야곱이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고,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크게 두렵고 답답해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두 떼로 나누고, 형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가족과 모든 소유를 얍복 나루 건너편으로 보낸 뒤 홀로 남습니다.
바로 그 밤, 야곱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합니다. 그는 환도뼈를 다쳐 평생 절뚝이게 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습니다. 이전의 야곱은 자신의 손으로 축복을 움켜쥐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의 야곱은 하나님을 놓지 않고 매달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전에는 남을 붙잡아 자리를 얻으려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얍복 나루는 야곱이 꺾인 자리이지만, 동시에 새롭게 세워진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부러뜨려 버리기 위해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과 계산을 의지하던 사람을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으로 빚으시기 위해 만나셨습니다. 야곱의 절뚝거림은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더 이상 자기 힘만 믿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은혜의 흔적입니다.
돌아가라는 말씀, 피할 수 없는 과거를 향한 길
창세기 31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벧엘에서 들었던 약속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으셨고, 마침내 그를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야곱을 편한 길로만 이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에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반의 압박을 피할 수 있었지만,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더 깊은 두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형 에서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끄신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불편한 과거를 피할 수 있는 길만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은 종종 우리가 외면하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오래된 죄를 인정해야 할 자리, 깨진 관계를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할 자리, 미뤄 둔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리, 상처 때문에 닫아 둔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할 자리로 부르십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로 후퇴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과거를 새롭게 마주하는 일입니다. 야곱은 예전의 야곱으로 에서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붙드는 사람으로 갑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면서 자신을 “주의 종 야곱”이라 낮추어 부르고, 에서를 “내 주 에서”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그가 이제는 형 앞에 자신을 낮추려 합니다. 이것은 계산이 섞인 외교적 표현일 수 있지만, 동시에 야곱이 과거의 태도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실 때, 그 사람의 언어와 관계의 태도부터 다루십니다.
두려움 가운데 드린 야곱의 기도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은 크게 두려워하고 답답해했습니다. 사백 명은 단순한 가족 방문의 규모가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가 자신을 공격하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거의 죄가 눈앞에서 현실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는 먼저 사람들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눕니다. 한 떼가 공격받으면 다른 떼는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그는 암염소, 수염소, 암양, 숫양, 낙타, 암소와 황소, 암나귀와 수나귀를 여러 떼로 나누어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야곱은 최선을 다해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창세기 32장 9절 이하의 기도는 야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붙듭니다.
그는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라고 고백합니다. 예전의 야곱은 축복을 빼앗고 움켜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빈손으로 요단강을 건넜지만, 이제 두 떼나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야곱은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라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는 강한 척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기도한 뒤에도 선물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나눕니다. 이는 그가 기도했으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책임 있게 준비하는 것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지혜롭게 계획하고, 화해를 위해 먼저 손을 내밀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의 계획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의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건넌 뒤, 홀로 남은 사람
그날 밤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넙니다. 그는 가족과 소유를 모두 강 건너편으로 보냅니다. 창세기 32장 24절은 아주 짧고 강하게 말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제 야곱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도, 종들도, 가축도, 선물도, 자신이 준비한 전략도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 그는 홀로 남았습니다. 그 밤에는 에서가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과거의 죄가 있었으며, 앞으로의 생사가 걸린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홀로 남게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족과 교회를 통해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혼자 모든 짐을 져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누구도 대신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죄,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두려움,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야곱은 강 건너편으로 가족과 재물을 보냈지만, 자기 마음속의 두려움은 건너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에서의 손을 피할 수 없었고,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홀로 남은 자리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십니다.
사람이 홀로 남는 밤은 두려운 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의지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서는 자리에서 가장 깊은 만남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인간관계, 재산과 계산을 붙들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손을 제대로 붙들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배우게 됩니다.
날이 새도록 이어진 씨름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합니다. 본문은 처음에 그를 단지 “어떤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씨름이 끝난 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했다고 고백합니다. 호세아 12장 3절과 4절은 야곱이 힘으로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했다고 해석합니다.
창세기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호세아는 “천사”라고 말하며, 야곱 자신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표현들은 모순이 아니라, 얍복 나루에서 야곱이 단순한 낯선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맞부딪혔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 혹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의 현현을 통하여 야곱을 만나셨습니다.
야곱의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의 전 생애가 응축된 영적 씨름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발꿈치를 붙들었고, 형의 장자권을 붙들었으며, 아버지의 축복을 붙들었고, 라반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방식으로 재산을 붙들려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삶을 붙들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에서 그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빼앗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살기 위해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기려고 대드는 교만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기에 매달리는 믿음의 몸부림입니다.
호세아는 야곱이 울며 하나님께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그의 눈물을 직접 기록하지 않지만, 호세아는 얍복의 씨름을 눈물의 기도로 해석합니다. 야곱의 씨름은 자기 힘을 과시하는 격투가 아니라, 무너진 사람이 하나님께 울며 매달리는 기도였습니다. 참된 기도에는 때로 이런 씨름이 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탄식, 밤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까지 물러설 수 없는 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꺾으신 자리, 야곱이 붙든 자리
창세기 32장 25절은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니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은 그분이 야곱의 환도뼈를 단 한 번 건드심으로 어긋나게 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힘이 부족해서 야곱을 이기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씨름할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손길로 야곱이 평생 의지하던 힘을 꺾으셨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다쳐 절뚝이게 되었고, 이제 상대를 이기기 위해 힘을 쓰는 대신 그분에게 매달려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파괴하기 위해 환도뼈를 치신 것이 아니라, 야곱이 자기 힘을 의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를 꺾으셨습니다. 야곱은 평생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 손에 쥐기 위해, 자기 길을 만들어 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네 힘으로 살 수 없다. 너는 나의 은혜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모든 육체적 질병이나 장애를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징계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고난의 모든 원인을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보고 쉽게 “하나님이 당신을 꺾으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분명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건강의 한계, 경제적 위기, 관계의 무너짐, 계획의 실패, 나이와 시간의 흐름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 붙드는 법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약함 자체가 선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몸의 가시를 두고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야곱의 절뚝거림과 바울의 가시는 동일한 사건이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날이 새려 할 때 그 사람은 야곱에게 자신을 놓아 달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야곱의 삶에서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전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의 옷을 입고, 거짓말을 하며,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아 축복을 붙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속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꾀로 축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억지로 붙잡아 복을 받아 내겠다는 거래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내게는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야곱의 손은 더 이상 형의 발꿈치나 아버지의 축복을 붙드는 손이 아닙니다. 이제 그 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직접 고백하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나는 야곱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야 합니다. 발꿈치를 잡았던 사람, 속임수로 축복을 얻으려 했던 사람, 두려움 때문에 도망했던 사람, 바로 그 야곱입니다.
회복은 자기 이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설 수 없습니다. 에서의 옷을 입고 축복을 빼앗았던 야곱처럼,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과거와 죄를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만 하기 위해 이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름을 주시기 위해 물으십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 이름을 받은 사람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본문 안에서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보다 더 강해져서 승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곱의 승리는 하나님을 이겨서 얻은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놓지 않음으로 받은 승리입니다. 그는 환도뼈가 어긋난 뒤에도 하나님께 매달렸고, 자기 힘을 잃은 자리에서 은혜를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의 씨름을 귀하게 여기시고,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이름을 넘어 장차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이름이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과거를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새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절뚝이며, 여전히 과거의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과거가 그의 최종 정체성이 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야곱은 더 이상 속임수와 두려움으로만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이스라엘이 됩니다.
우리도 과거의 실패로 자신을 정의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늘 같은 죄에 넘어지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는 우리의 삶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는 우리의 최종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고,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새 피조물이라고 부르십니다. 새 이름은 내가 나를 새롭게 꾸미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실 때 주어집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으나 살게 된 자리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릅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야곱은 그 밤에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했고, 자신이 살아남은 것을 은혜로 고백합니다.
그는 그분의 이름을 묻지만, 그분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응답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완전히 붙잡아 분석하고 다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자유로우시며,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히 감추기만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브니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셨다고 선포합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뵙고도 살았습니다. 이는 야곱이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그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절뚝이며 떠오르는 해를 맞은 사람
창세기 32장 31절은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가 그의 허벅지로 말미암아 절었다고 기록합니다. 밤은 지나갔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예전과 같은 걸음으로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야곱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씨름했고, 새벽빛 속에서 절뚝이며 길을 떠납니다. 그는 강해져서 당당하게 걷는 사람이 아니라, 약해졌지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걷습니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남았지만, 그의 이름은 달라졌습니다. 그의 걸음은 느려졌을지 모르지만, 삶의 방향은 새로워졌습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을 칭찬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는 사람,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다른 사람의 약함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야곱의 절뚝거림은 그가 하나님께 패배했다는 표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자기 힘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때때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상처와 흔적이 남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은 이스라엘 자손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의 힘줄을 먹지 않는 전통을 언급합니다. 이는 얍복 나루의 사건을 공동체가 잊지 않도록 하는 기억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조상이 강해서 하나님을 이긴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려 은혜를 입은 야곱에게서 나온 백성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마침내 에서를 만납니다. 그는 가족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형 앞으로 나아가 일곱 번 땅에 엎드립니다. 과거에는 형을 속여 축복을 빼앗았지만, 이제 그는 형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에서가 야곱을 맞으러 달려와 그를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입 맞추며 함께 웁니다. 야곱이 가장 두려워했던 형의 얼굴이 심판의 얼굴이 아니라 화해의 얼굴로 다가옵니다. 물론 이 화해가 두 사람의 모든 복잡한 관계를 한순간에 완전히 해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 야곱은 에서와 거리를 두고 숙곳과 세겜으로 향합니다. 화해에는 진실과 지혜, 때로는 적절한 거리와 경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며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브니엘의 경험과 연결됩니다. 야곱은 밤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고, 아침에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형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사람과의 관계를 향한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화해를 향해 걸어갑니다. 물론 모든 관계가 즉시 회복되거나 반드시 이전처럼 가까워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과 학대, 지속적인 위험이 있는 관계에서는 안전을 지키는 지혜와 도움을 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화해는 진실을 덮어 버리거나 피해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책임을 인정하고 화해의 길을 구해야 합니다. 얍복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사람은 더 이상 과거를 숨기며 도망치는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용서를 구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길로 이끕니다.
호세아가 다시 부른 얍복의 밤
호세아 12장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야곱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호세아는 야곱이 태중에서 형의 발꿈치를 잡았고, 장성해서는 하나님과 겨루었으며,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를 만나셨고, 하나님께서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호세아는 야곱의 이야기를 단지 과거의 영웅담으로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거짓과 불의, 우상숭배에 빠진 현실을 향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네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고 권면합니다.
얍복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붙든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계산과 욕심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은혜를 구하면서도 이웃에게 인애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마음속 감동만 느끼는 일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관계의 방식이 바뀌는 일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매달렸고, 그 은혜를 입은 뒤 에서 앞에 낮아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은 반드시 사람을 향한 태도에도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속이고, 약한 이를 짓누르고, 불의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맺음말|은혜를 붙들어 절뚝이며 걷는 믿음
얍복 나루의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얻기 위해 속였고, 위기를 피하기 위해 도망했으며, 두려움 앞에서 온갖 계산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홀로 남게 하시고, 밤새 씨름하게 하시며, 그의 환도뼈를 꺾으셨습니다.
그 꺾임은 야곱을 버리기 위한 꺾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더 이상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은혜를 붙들게 하시기 위해 그를 만나셨습니다. 야곱은 절뚝이게 되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약해졌지만 하나님께 붙들렸고, 상처를 입었지만 삶의 방향은 새로워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얍복의 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죄와 상처가 다시 찾아오고,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나 문제를 마주해야 하며, 자기 힘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끼는 밤이 있습니다. 그 밤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힘으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쳐도 하나님을 놓지 않기 바랍니다. 답이 보이지 않아도 기도를 멈추지 않기 바랍니다. 자신의 이름과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이름과 새 길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해가 떠오를 때 야곱은 절뚝이며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도망자 야곱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우리도 완벽하게 강한 걸음으로가 아니라, 은혜를 의지하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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