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벧엘에서 만난 도망자의 하나님
2부. 도망과 광야와 기다림 속에서 빚어지는 길
야곱, 벧엘에서 만난 도망자의 하나님
- 창세기 27:41-28:22
- 함께 읽을 말씀: 창세기 35:1-15
야곱의 벧엘 이야기는 아름다운 꿈의 이야기이기 전에, 한 도망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순례자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선 것도 아닙니다. 그는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챈 뒤, 더 이상 집에 머물 수 없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약속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손자였고 이삭의 아들이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언약의 복은 야곱을 통하여 이어질 것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가문 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야곱의 삶이 저절로 바르게 흘러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 힘과 꾀로 축복을 붙들려 했고, 그 결과 사랑하는 가족과 관계가 깨졌습니다.
창세기 27장 41절은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다고 말합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뒤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형의 눈을 피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는 하란을 향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남긴 결과를 등에 지고 혼자 길 위에 섰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십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깊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며 달아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을 베개 삼고 잠든 그 밤에 하늘을 열어 보이시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고 약속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이 위대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리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올 때만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길을 잃고, 관계가 깨어지고, 앞날이 막막하며, 자신의 잘못 때문에 도망치고 있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속임수로 붙들려 했던 축복
야곱의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삶의 긴장을 보여 줍니다. 그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발꿈치를 잡는 자, 나아가 남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는 자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과 아버지의 축복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기보다 자기의 방법으로 그것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에서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그 틈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얻습니다. 이어 창세기 27장에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그는 에서의 옷을 입고, 손과 목에 염소 가죽을 두르며, 자신을 에서라고 거짓말합니다. 그 결과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야곱은 축복의 가치를 알았지만, 축복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이 이루시도록 기다리기보다, 자기 손으로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한 사람이 아니라, 약속을 자기 방식으로 성취하려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야곱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바라며, 말씀의 약속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길어지면 조급해집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관계를 이용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택하거나, 다른 사람을 밀어내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속임수로 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순한 방법으로 붙든 것들은 우리를 더 깊은 두려움과 상처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얻었지만 평안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고, 형의 얼굴을 피해야 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하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죄는 종종 우리가 원하던 것을 손에 쥐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손에 쥔 것이 우리 마음의 평안과 관계와 정직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죄로 그 약속을 왜곡할 때 그 죄의 결과까지 가볍게 없던 일로 하시지는 않습니다.
벧엘로 가는 길, 집을 잃은 사람의 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를 알고 야곱을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보냅니다. 겉으로는 야곱이 가나안 여인 가운데서 아내를 맞지 않도록 하기 위해 떠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에서의 손을 피해 야곱을 피신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삭도 야곱을 축복하며 밧단아람으로 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28장 10절은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야곱의 상실이 담겨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던 땅입니다. 야곱은 그 언약의 집에서 떠났습니다. 그가 향하는 하란은 아브라함이 처음 떠났던 고향 쪽의 땅이지만, 야곱에게는 낯선 유배지와 같습니다.
해가 지자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유숙합니다. 그는 돌 하나를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누웠습니다. 이전까지 야곱은 아버지의 장막 안에서 살았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가족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침상 삼아 잠듭니다. 돌이 그의 베개가 되었다는 표현은 그의 외로움과 불안정함을 보여 줍니다.
이 밤은 야곱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는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꾀가 많았지만, 이제 자신의 꾀로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얻으려 했지만, 이제는 집조차 잃은 사람처럼 길 위에 누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할 때 강해 보일 수 있지만, 삶의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한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돌을 베고 누운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벧엘의 은혜는 야곱이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이 가장 초라해 보이는 밤, 그가 자기 잘못의 결과를 안고 도망하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돌베개 같은 밤을 지납니다. 마음 둘 곳이 없고, 누구에게도 속을 다 말하기 어려우며, 지나온 선택을 후회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밤입니다. 그러나 벧엘은 그런 밤이 하나님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열려 있는 하나님의 세계
야곱은 꿈을 꿉니다. 땅에 사닥다리가 서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으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여기서 “사닥다리”로 번역된 말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좁은 사다리보다, 하늘과 땅을 잇는 계단이나 경사로에 가까운 표현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구조물의 정확한 모양이 아니라, 야곱이 보게 된 사실입니다. 하늘은 닫혀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세계는 야곱의 광야와 단절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돌을 베고 누운 채 홀로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의 삶은 우연과 두려움의 연속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당신의 뜻을 따라 일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보지 못하는 세계에서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하고, 일이 막히면 하나님이 멀어지셨다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응답이 더디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벧엘의 꿈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하늘의 도움과 하나님의 통치가 땅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도망자의 길을 보시고, 광야의 잠자리를 아시며, 우리의 내일을 아십니다. 우리의 삶이 혼란스럽게 느껴져도 하나님은 혼란에 빠지지 않으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야곱의 벧엘 꿈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참된 길이십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보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하늘에 오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야곱의 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다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야곱은 조상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주셨으며, 가나안 땅을 언약으로 주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그 조상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누워 있는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져 동서남북으로 퍼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야곱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가장 절실하게 들렸을 말씀은 이어지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은 가족을 떠났고, 고향을 떠났으며, 자기 죄의 결과를 안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맹세한 뒤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자신의 죄를 완전히 고백하고 삶을 바로잡은 뒤에 얻은 약속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야곱이 어떻게 축복을 빼앗았는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은혜는 죄를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서 손을 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약속은 야곱에게 앞으로 아무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오랜 세월 힘든 노동을 하며, 가족 안의 갈등과 상실을 겪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형을 속였던 방식과 닮은 속임을 라반에게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고난의 면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너무 쉽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의 길을 즉시 평탄하게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길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문제 없는 삶의 보장이 아니라, 어떤 문제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시는 은혜입니다.
두려움이 거룩한 경외로 바뀐 자리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두려워하며 “이곳이여 어찌 그리 두려운고.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처음에 에서가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고,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내일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그는 더 깊은 두려움, 곧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를 경험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도망치게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를 바른 자리로 세웁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고백은 벧엘의 핵심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제단과 이삭의 장막에만 계시는 분인 줄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의 돌베개 곁에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특별한 장소에서만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예배의 공동체는 중요하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 가운데 자기 백성을 세우시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당 안에만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병상의 밤에도, 낯선 도시의 방에도, 실패 후의 침묵에도, 눈물의 길에도 함께하십니다.
야곱은 돌베개로 삼았던 돌을 세워 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루스에서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이전까지 그곳은 이름 없는 한 장소였지만, 하나님을 만난 뒤에는 은혜의 기억이 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벧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기억을 붙드는 자리, 말씀 앞에서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운 시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깨달은 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전에 나를 붙드셨다면, 오늘도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야곱의 서원, 아직 자라 가야 할 믿음
야곱은 벧엘에서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셔서 가는 길을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며,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자기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자신이 세운 돌기둥이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서원을 읽을 때 야곱이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다고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약속에 응답하며,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안전한 귀환을 구하는 그의 기도는 도망자에게 매우 현실적인 필요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실을 떠난 기도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야곱의 언어에는 아직 미성숙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서도,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면”이라는 조건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루아침에 완성된 믿음의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라반의 집에서 긴 세월을 보내며, 얍복 나루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 사람인지를 더 깊이 배워야 합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성품과 습관이 하루 만에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한 번 만나 주신 뒤에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긴 세월을 통하여 그를 다루시고, 그의 계산과 욕망을 꺾으시며, 약속의 사람 이스라엘로 빚어 가셨습니다.
신앙은 한 번의 감동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조금씩 변화되는 여정입니다. 우리는 아직 부족한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성숙한 기도도 들으시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믿음을 더 깊고 온전하게 자라게 하십니다.
다시 벧엘로 부르시는 하나님
함께 읽을 창세기 35장은 벧엘의 은혜가 야곱의 삶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가족과 재산을 이루며, 형 에서와도 화해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여전히 위기와 상처가 있습니다. 세겜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이후, 야곱의 가족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놓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나님은 야곱을 처음 만난 자리로 다시 부르십니다. 이는 과거의 감동을 되풀이하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처음 은혜를 기억하고, 삶을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정돈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야곱은 가족과 모든 사람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의복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이방 신상과 귀고리를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벧엘로 돌아가는 길에는 단지 장소의 이동만이 아니라 삶의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예배하려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우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벧엘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말씀 앞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던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신 은혜를 분명히 알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벧엘로 돌아가는 길에는 버려야 할 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돈, 사람의 인정, 상처에 대한 집착, 죄의 습관, 내 뜻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창세기 35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시고,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부르십니다. 이 이름은 얍복 나루에서 주어진 이름을 다시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땅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십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야곱은 단지 “벧엘”이라는 장소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벧엘에서 자신을 만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어떤 특별한 장소나 감정 자체를 붙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며, 삶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참된 벧엘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보았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 하늘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이심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세계로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된 길이십니다. 야곱이 본 사다리는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로 내려오시며, 하늘과 땅 사이에 길을 여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기 의와 노력으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도망자 야곱에게 벧엘이 필요했던 것처럼, 죄와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모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숨기고 싶은 죄, 두려움과 상처를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은혜의 약속으로 부르십니다.
맺음말|돌베개 위에도 임하는 은혜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도망자였고, 속임수의 결과를 안고 길 위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축복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그의 앞에는 낯선 땅과 불확실한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을 열어 보이시고, 조상들에게 주셨던 언약을 다시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절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야곱처럼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안고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관계가 깨어지고, 앞날이 불안하며,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는 밤을 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베개 위의 밤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도 하나님은 이미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도망치던 자리에서 멈추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과거의 잘못을 숨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 바랍니다. 그리고 벧엘로 돌아가는 믿음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우상을 버리고, 삶의 자리마다 제단을 세우며, 말씀에 따라 다시 걸어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긴 세월을 통해 이스라엘로 빚어 가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미성숙과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며, 도망자의 길을 믿음의 순례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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