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언제 창조되었나요?

하나님은 언제 창조되었나요?|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하나님

“세상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부터 존재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은 신앙을 처음 접한 사람만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어린이부터 철학자와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물어 온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어느 시점에 생겨납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나무는 씨앗에서 자라며, 별과 행성도 형성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도 시작과 원인이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주 안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시간과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제 창조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목차

창세기는 하나님의 시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첫 문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berē’šît bārā’ ’ĕlōhîm)입니다. ‘태초에’는 하나님이 생겨난 시점이 아니라 천지창조가 시작된 시점을 가리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계시며, 모든 창조 행위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이는 성경 기자가 하나님의 기원을 실수로 빠뜨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원을 설명해야 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존재를 설명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철저히 구분합니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해와 달, 식물과 동물,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된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를 존재하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 ’ehyeh ’ăšer ’ehyeh)입니다. 이 표현은 “나는 나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자다”, “나는 내가 될 자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유롭고 신실한 존재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받아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존재하기 위해 외부의 원인이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자존성(自存性), 또는 라틴어로 아세이타스(aseitas)라고 부릅니다. 자존성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의 원인을 자신 밖에 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존재가 자신을 창조하려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성경적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된 적이 없으며 본래부터 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의존하지만 하나님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음식이나 공기, 공간이나 에너지, 다른 존재의 인정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가진 분 정도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반론이 자주 제기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이 주장하는 명제는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가 아닙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그 존재의 원인을 필요로 합니다.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했다면 우주의 존재를 설명할 원인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태어났다면 부모와 생물학적 과정이 있고, 건물이 세워졌다면 설계자와 건축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은 영원한 존재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의 원인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은 “삼각형은 무슨 맛입니까?” 또는 “북극보다 더 북쪽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범주의 혼동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삼각형은 맛으로 분류되는 대상이 아니고, 북극은 북쪽 방향의 끝이므로 그보다 더 북쪽을 같은 방식으로 물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질문 자체를 조롱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 안에 숨어 있는 전제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우주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매우 강력한 존재로 상상하면 그분에게도 기원과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존재들과 나란히 놓이는 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가 존재하도록 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십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단지 아주 오래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90편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가 조성되기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사야서도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으로 선포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은 단지 헤아릴 수 없이 오래 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올람(עוֹלָם, ‘ōlām)은 먼 과거와 끝없는 미래, 인간의 시야를 넘어서는 영원성을 나타냅니다. 신약의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 aiōnios)도 시대를 초월하거나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은 인간의 시간을 무한히 늘여 놓은 것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따라 존재합니다. 우리는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기다립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를 미리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에 끌려다니거나 늙어 가는 분이 아닙니다. 시간도 창조세계의 질서에 속하며,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주이십니다.

고전적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시간에 갇혀 있지 않으며 모든 시간을 영원한 현재 안에서 아신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처럼 몰랐던 것을 나중에 배우거나, 예상하지 못한 미래를 맞이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의 지식과 존재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는 정통 기독교 안에서도 세부적인 논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는 시간 밖에 계셨으나 창조 이후 피조물의 시간과 실제로 관계하신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핵심은 하나님께 시작이나 끝이 없고, 시간에 의해 쇠하거나 제한되지 않으며, 모든 시대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무한한 과거를 어떻게 지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셨다면 오늘에 도달하기까지 무한히 긴 시간을 지나와야 했으므로 현재에 이를 수 없다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오래 살아온 존재로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처럼 과거의 순간을 하나씩 통과하여 오늘에 도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시간의 근원이시며 완전한 지식으로 모든 순간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아주 긴 수명’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 속 첫 번째 사건과 마지막 사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역사의 시작과 완성을 주관하시며, 시간 전체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인간의 이성이 완전히 그려 낼 수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 밖에서 존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은 다릅니다.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충분히 상상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원인이 계속 이어진다면 어디에서 멈춰야 합니까?

하나님에게도 창조자가 있고, 그 창조자에게도 또 다른 창조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원인의 사슬은 끝없이 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왜 지금 무엇인가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얻지 못합니다. 설명해야 할 대상을 무한히 뒤로 미룰 뿐입니다.

기독교 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한한 것들을 우연적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연적’이라는 말은 아무 이유 없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존재하기 위해 다른 원인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별, 지구와 우주는 모두 존재를 다른 조건에 의존합니다.

반면 필연적 존재는 존재를 외부에 의존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를 뜻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러한 필연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원인의 긴 사슬에서 가장 먼저 위치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와 원인관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궁극적인 근거이십니다.

그렇다고 철학적 논증만으로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두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우주가 자존적인 근원을 필요로 한다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지니며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영원한 하나님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인격적 하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되지 않으셨다는 고백은 성부 하나님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성자와 성령도 영원하시며 창조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는 성부만 본래 하나님이고 성자와 성령은 나중에 생겨났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표현은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en archē ēn ho logos)입니다. 중요한 것은 ‘태초에 말씀이 생겨났다’가 아니라 ‘태초에 이미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고 선언합니다. 만일 말씀이신 성자가 피조물이라면, 모든 창조물이 그를 통하여 지어졌다는 선언과 충돌합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를 ‘영원발생’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나셨다’는 말은 어느 시점에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영원히 공유하시면서도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이심을 나타냅니다.

초대교회의 니케아 신경은 성자를 “나셨으나 지음받지 아니하시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이는 성자를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피조물로 보는 주장을 거부하기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성령도 창조된 영적 능력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창조 때부터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생명을 주시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광과 경배를 받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신이 아니라 한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셨는데 어떻게 창조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면 그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취하여 참사람이 되신 사건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역사 속 특정한 시점에 태어나셨지만, 신적 위격으로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성자의 존재가 시작된 곳이 아니라 영원하신 성자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자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성자가 하나님이기를 그만두고 인간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성을 그대로 지니시면서 참된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본성을 입으셨지만 창조주로서의 신성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 구별은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영원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신성이 소멸하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닙니다. 성자께서는 취하신 인간의 본성으로 실제 죽음을 경험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는 첫 피조물이라는 뜻입니까?

골로새서 1장은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창조한 존재라는 뜻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은 정반대의 사실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먼저 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토토코스(πρωτότοκος, prōtotokos)는 시간적으로 첫 번째로 태어났다는 뜻만이 아니라 지위와 권세에서 으뜸인 상속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실제 출생순서와 관계없이 특별한 권위와 상속권을 받은 사람을 장자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골로새서가 말하는 핵심은 그리스도가 창조물 가운데 첫 번째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 위에 계신 주권자이시며 창조의 근원이자 목적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도록 보존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의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는 표현도 첫 번째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근본’으로 번역된 아르케(ἀρχή, archē)는 시작뿐 아니라 기원, 근원, 통치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신약 전체의 증언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의 근원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외로워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홀로 계셨다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이 질문에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부터 사랑과 기쁨의 완전한 교제를 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이나 찬양이 부족해서 외로움을 채우려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완전하고 충만하십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선하심과 영광을 자유롭게 나타내신 행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이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창조주를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누릴 때 피조물로서 존재의 목적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거래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없으면 불완전해지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받은 생명과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각을 포기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셨다는 대답이 문제를 피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계관은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 어느 지점에서는 더 이상 다른 원인을 요구하지 않는 설명을 제시해야 합니다.

유물론은 물질이나 에너지, 자연법칙 또는 우주적 실재가 궁극적으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인격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원한 하나님이 궁극적인 실재라고 고백합니다. 쟁점은 “아무것도 궁극적이지 않은 세계”와 “궁극적인 것이 있는 세계”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무엇을 궁극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에 있습니다.

물질과 자연법칙은 왜 존재하는지, 왜 우주가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질서를 가지는지, 어떻게 인격과 의식과 도덕적 가치가 등장했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우주의 질서와 생명, 이성과 도덕성이 영원하고 지혜로우며 선하신 창조주에게 근거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존재가 실험실의 물체처럼 증명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버리는 비약도 아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와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계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모순되는 것은 다릅니다

시작이 없는 존재를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늙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를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인간의 사고를 넘어서는 신비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신비와 모순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창조되었으면서 동시에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모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시작 없이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설 뿐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은 아닙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바다의 크기를 온전히 상상하지 못한다고 해서 바다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 안에 갇힌 개념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참되게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이 계시하신 만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신학은 신비를 제거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와 인간이 알 수 없는 경계를 분별하는 작업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간과 세계를 초월하신다는 설명만 강조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너무 멀리 떨어진 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영원하시면서도 역사 안에 들어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광야에서 백성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마침내 영원하신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과 몸, 눈물과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을 얼마나 진지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배고픔과 피곤함, 외로움과 배신, 고통과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의 자리에 서셨고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성은 차가운 철학적 속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늙고 쇠하여도 그분의 사랑과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위로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알고 붙드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창조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은 결국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을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오래된 존재로만 생각하면 그분도 누군가에게 만들어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큰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이 구분을 잃으면 하나님을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축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주의 일부나 강력한 영적 에너지로 생각하고, 인간이 종교적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처럼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과 판단 아래 놓이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존재와 존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사랑 안에서 창조된 사람입니다.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족쇄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인간은 자기 존재의 바른 자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과 신비로 남는 것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시작과 끝 없이 영원히 존재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영원하시며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영원한 성자이십니다.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를 비롯한 고전적 기독교 전통은 이를 하나님의 자존성, 영원성, 불변성이라는 교리로 설명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생명과 완전함을 다른 곳에서 얻지 않으며, 모든 존재가 그분에게 의존합니다.

하나님이 시간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 영원한 현재라는 개념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는 철학적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큼 하나님의 내적 존재방식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신비가 남는다고 해서 핵심 진리가 불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흐르다가 어느 날 탄생한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과 모든 생명이 그분의 창조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에도 창조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으며, 영원부터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하신 분도 아니고 더 높은 신에게서 태어난 분도 아닙니다. 모든 존재와 시간과 원인의 궁극적인 근원이십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감추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세계와 성경,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내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철학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고, 죄인을 구속하며, 지금도 붙드시고, 마침내 새 창조로 인도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셨고, 우리의 생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준비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기도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유한한 생각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세상과 생명과 시간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게 하시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리를 외면하거나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교만하지 않게 하옵소서. 영원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하시며,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과 약속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시작과 마지막을 붙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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