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부족하고 연약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부족하고 연약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다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외롭지도 않고, 사랑이 부족하지도 않으며, 누군가의 찬양을 받아야 만족하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굳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더욱이 인간이 죄를 짓고, 자연이 고통받으며, 질병과 죽음이 가득한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셨다면 세상을 만들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창조의 목적만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랑, 인간의 연약함과 악의 존재, 그리스도의 구원과 세계의 최종 목적을 함께 묻습니다. 성경의 대답을 먼저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하고 충만한 선하심과 영광을 자유롭게 나타내고, 피조물이 그 선하심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기뻐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선하게 창조된 세계가 왜 연약해졌으며, 타락을 아신 하나님이 왜 창조하셨는지를 차근차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이 없으면 불완전해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행복과 사랑을 외부에서 공급받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며,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다고 선포했습니다(행 17:24-25).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자충족성(自充足性)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생명, 지혜와 사랑, 기쁨과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없으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피조세계가 없어도 영원히 완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를 “외로워서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도 사랑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과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부는 영원부터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과 생명의 교제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외로움이나 관계의 결핍이 없습니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부족함을 채우신 사건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행하신 사건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필수가 아니라 자유로운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상을 창조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완전함에는 아무 부족함도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외부의 압력이나 내적인 결핍 때문에 행하셨다면 창조는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기쁨에 따라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지음을 받았다고 찬양합니다(계 4:11). 창조는 하나님에게 강요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롭고 지혜로운 결정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이유 없이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한 지혜와 선하심에 따라 행하십니다. 다만 그분의 행동이 어떤 피조물의 필요나 권리, 외부의 법칙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근거는 우연이나 필연적인 자연법칙만이 아니라 창조주의 자유로운 뜻과 선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냅니다(시 19:1). 만물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면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우주적인 자기애나 나르시시즘이 아닐까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궁극적인 선이 아니므로 자신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으면 거짓과 교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모든 선과 생명과 아름다움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낮은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신다면 오히려 진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부족한 명예를 피조물에게 받아 채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곧 그분의 지혜와 권능, 거룩함과 사랑, 공의와 자비를 창조세계 안에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빛은 비춤으로 자신의 밝음을 나타내고, 샘은 물을 흘려보냄으로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물론 하나님을 자연물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이 비유는 창조가 결핍보다 충만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은 영광이 부족해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만하시므로 그 영광을 피조물이 알고 누리도록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간을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도구처럼 느끼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피조물의 참된 행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선하심을 누릴 때 가장 인간다운 존재가 됩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릴 때 생명을 얻습니다. 인간은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 있을 때 자기 존재의 목적과 기쁨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참된 생명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기 영광을 강제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폭군이 아니라, 자신의 충만한 생명과 기쁨 안으로 인간을 부르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았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행복의 근원이 되려 한 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려 했지만 오히려 욕망과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를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목적은 추상적인 영광의 전시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여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말씀에 응답하고, 창조세계를 돌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뜻하는 히브리어 첼렘 엘로힘(צֶלֶם אֱלֹהִים, ṣelem ’ĕlōhîm)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신적 본질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고, 관계와 도덕성과 창조적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지음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노예나 장식품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사랑으로 응답하며,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 사이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언약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창조세계를 가꾸는 성소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이 필요해서 창조하신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인간을 사랑하기로 뜻하셨습니다. 필요 없는 사랑이 오히려 더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울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사랑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부족하고 악하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질문에는 “왜 하나님은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라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폭력,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한 상태를 본래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창조의 선함과 피조물의 유한함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유한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않았고, 한 장소와 시간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먹고 자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함은 악이나 결함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간의 부족함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바른 조건입니다. 새가 물속에서 살 수 없고 물고기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해서 창조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성과 목적에 따라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똑같이 무한하고 자존적인 존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창조된 자존적 존재’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창조되었다면 존재를 하나님께 의존하며, 자존적이라면 창조되지 않아야 합니다.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유한하고 의존적입니다.
따라서 최초 세계는 유한했지만 선했고, 변화할 수 있었지만 부패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의존했지만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유한함과 죄악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창조의 처음은 아직 최종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선했지만 성경 역사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아직 시험을 통과하여 영광 가운데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었고 불순종할 수도 있었습니다.
고전적 신학은 타락 이전의 인간을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반면 새 창조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천국에서의 거룩함은 자유의 상실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창조는 에덴에서 시작되지만 새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에덴에는 타락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에덴에는 동산의 한 지역에 생명나무가 있었지만,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의 열매가 충만합니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깨어졌지만,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
따라서 창조의 목적은 단순히 처음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고 안전한 생명과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인간의 타락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언제나 죄이며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반역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죽음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이나 본성이 아닙니다. 고전적 기독교 신학은 악을 선의 결핍과 왜곡으로 설명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프리바티오 보니(privatio boni), 곧 ‘선의 결여’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욕망과 의지는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성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고, 욕망을 하나님보다 피조물에 두었으며, 의지를 사용하여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죄는 새로운 능력이 아니라 선한 능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굽어진 상태입니다.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의 조화도 손상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창조세계는 허무와 썩어짐의 종노릇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탐욕과 폭력, 질병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계의 선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타락으로 손상된 창조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한계와 고통의 구체적인 형태가 타락 전후에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성경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의 타락 이전 동물의 죽음과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는 정통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죄가 창조세계 전체에 깊은 왜곡과 고통을 가져왔으며, 현재의 세계가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최종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할 것을 알면서 왜 창조하셨습니까?
이 질문이 가장 어렵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고 세상에 엄청난 고통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조하지 않는 편이 더 사랑로운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시거나 인간에게 죄를 강요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죄의 조성자가 아니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거부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동시에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밖에서 발생한 예상치 못한 사고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께서 죄를 명령하거나 직접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지혜로운 섭리 안에서 그것을 허용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타락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한 모든 이유를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남습니다.
우리는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이 필요했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실제 피해와 고통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재료로 가볍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배신과 폭력, 질병과 죽음은 실제로 슬프고 파괴적인 현실입니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보다 크시며, 악이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으시면서도 인간과 사탄의 악을 자신의 구원 목적 아래 두고, 그것을 통하여 예상할 수 없는 선을 이루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악한 의도로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사용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형들의 행위는 여전히 악했고 책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가장 깊이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이기고 선을 이루시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배신과 종교적 위선, 정치권력의 불의와 폭력이 결합한 악한 사건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처형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사건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는 가장 큰 선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제로 희생된 무력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는 심판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드러났으며,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할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1장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 이후 급히 마련된 임시 해결책이 아닙니다. 창조의 중보자이시며, 모든 피조물이 향해야 할 목적이십니다.
성자께서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은 창조세계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물질과 육체를 악하다고 여기고 영혼만 구출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취하시고, 인간의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창조가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새 창조의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손상된 세계를 폐기하고 전혀 무관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세계를 심판하고 정결하게 하며 새롭게 하십니다.
창조의 중심에는 언약이 있습니다
성경의 창조는 물질을 만들어 놓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관계를 맺고 말씀을 주시며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언약적 교제와 연결됩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고 약속과 책임의 질서를 세우시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창조세계를 다스리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고 구원의 언약을 이어 가셨습니다. 노아에게 창조세계의 보존을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을 불러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언약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영원한 왕국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첫째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완전히 순종하신 둘째 아담이시며, 참된 이스라엘이시고, 영원한 다윗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령을 받아 새 창조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은 단지 많은 생명체를 만들어 관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을 불러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알게 하고, 그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려는 언약적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창조세계를 돌볼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며 돌보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림’은 자연을 마음대로 착취할 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반영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창조세계가 번성하도록 섬기는 왕적·제사장적 사명입니다.
인간의 노동과 문화, 학문과 예술, 가정과 사회는 창조 목적과 무관한 세속적 활동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고 가꾸며, 잠재된 가능성을 문화로 발전시켜 창조주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죄는 이 사명을 왜곡했습니다. 돌봄은 지배와 착취로, 노동은 탐욕과 경쟁으로, 관계는 이용과 폭력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창조의 사명을 새롭게 회복합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자연을 돌보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모두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구원은 세상을 버리고 영혼만 천국으로 빠져나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사랑하되 우상으로 섬기지 않고, 선한 청지기로 돌보며,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오늘의 삶에서 미리 나타내는 것입니다.
연약함은 반드시 무가치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완벽한 것을 가치 있다고 여기며, 약함과 의존을 결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피조물의 연약함을 무조건 무가치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며,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의존성은 인간을 비천하게 만드는 수치가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본래 모습입니다.
문제는 연약함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교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의지할 때 바르게 살아갑니다. 완전히 독립적인 인간이 되려는 욕망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립과 불안을 낳습니다.
타락 이후의 연약함에는 질병과 노화, 정신적 고통과 죽음이 더해졌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병든 사람에게 “약함도 좋은 것이니 감사하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질병은 치료해야 하고, 폭력과 가난은 바로잡아야 하며, 고통받는 사람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으로 생긴 연약함마저 구원의 역사에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기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이는 고통 자체가 선하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도 하나님의 은혜를 무력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자의 모습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멀리서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기로 태어나 돌봄을 받으셨고, 배고픔과 피곤함을 경험하며, 눈물을 흘리고, 상처 입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보다 십자가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사랑의 행위이지만, 창조만 바라보면 그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경이도 있지만 지진과 질병, 포식과 죽음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현재의 자연 상태만으로 모두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고통이 가득한 세계를 멀리서 비난하지 않고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계의 고통을 피조물에게만 떠넘기지 않으시고, 성자 안에서 그 고통과 심판을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왜 모든 고통을 허용하셨는가?”라는 질문의 세부적인 철학적 답을 모두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죽음과 악을 최종적으로 이기실 능력과 뜻을 가지고 계심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새 창조입니다
현재의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완성된 최종 형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여 함께 탄식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때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롬 8:19-23). 성도 역시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만 다른 장소로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며, 하늘과 땅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회복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다시는 죽음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첫 창조를 실패작으로 버리고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으로 손상된 창조를 심판하고 정결하게 하여 영광스럽게 완성하시는 새 창조입니다. 창세기의 동산은 요한계시록의 성으로 발전하고, 한 지역에 있던 생명나무는 모든 민족을 치유하는 나무로 나타납니다.
창조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 되는 데 있습니다. 성도는 그 완성을 기다리면서 현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복음과 사랑, 정의와 돌봄을 통하여 새 창조의 표지를 세상에 나타냅니다.
“더 큰 영광을 위해 고통이 필요했다”고 말해도 될까요?
일부 신학적 설명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타락을 허용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창조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드러났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속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용서와 희생적 사랑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고통받는 사람에게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나 폭력의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 그의 고통을 하나의 수단으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체 섭리를 볼 수 없으며, 특정한 비극이 왜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악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동시에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 자신이 부활과 생명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고백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선한 목적을 거스르는 현실이며, 하나님은 그 악과 고통마저 자신의 구원과 새 창조를 좌절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 두 문장 가운데 하나만 말하면 성경의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과 신비로 남는 것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나 외로움 때문에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히 완전하고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영광을 나타내고, 피조물이 그 생명과 기쁨에 참여하도록 자유롭게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처음부터 악하거나 실패한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유한하고 의존적이지만 선한 세계였습니다. 인간의 죄로 창조질서가 훼손되고 죽음과 고통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과 새 창조를 이루고 계십니다.
성경이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타락 가능성이 있는 바로 이 세계를 선택하셨는지, 왜 각각의 구체적인 고통을 허용하셨는지, 다른 방식의 세계는 가능하지 않았는지를 우리는 모두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은 영역에서 지나치게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모든 비밀을 이해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히 계시하신 성품과 약속을 근거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에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의 근거는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해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고 충만한 선하심과 사랑을 자유롭게 나타내고,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생명과 기쁨에 참여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은 처음부터 악하거나 무가치하게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이므로 유한하고 하나님께 의존했지만, 그 유한함은 결함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의 선한 조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죄와 폭력, 질병과 죽음은 타락으로 손상된 세계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계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성자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로 죄를 담당하고, 부활로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창조의 최종 목적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세계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마지막 대답은 “하나님에게 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지 않은 우리를 자유롭게 사랑하시고, 자신의 선하심을 누리도록 존재를 선물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
완전하고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신 뜻과 사랑으로 저희를 창조하셨음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의 고통과 인간의 연약함 앞에서 이해되지 않는 질문을 숨기지 않게 하시며, 알지 못하는 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뜻이라 단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시고 부활로 새 창조를 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며, 오늘의 삶에서 창조세계를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마침내 만물을 새롭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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