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다니면 십일조를 내야 합니까?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에 응답하는 헌신입니다

“십일조를 꼭 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는 대개 두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믿음의 마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복을 잃거나 저주를 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면, 십일조를 내야만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헌금의 액수나 종교적 의무의 이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엡 2:8-9).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 성도에게 물질의 헌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하며, 기쁨과 책임을 가지고 교회와 이웃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문제는 십일조를 율법적 공포로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 안에서 감사와 믿음의 훈련으로 드릴 것인가에 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예배와 공동체를 위한 제도였습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토지의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제도였습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돕고 성막과 성전의 예배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민 18:21-24).

또한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공동체적 책임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신 14:28-29). 그러므로 구약의 십일조는 단지 “수입의 10퍼센트를 내면 복을 받는다”는 개인적 거래의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참된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예배와 공동체와 가난한 이웃을 함께 돌보는 언약 백성의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일(창 14장), 야곱이 십일조를 약속한 일(창 28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 정확히 십분의 일을 법처럼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 율법 아래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농경 사회, 레위 제도, 성전 예배, 절기와 구제의 질서 속에서 주어진 언약 제도였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의 말씀은 헌금을 강요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라기 3장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라는 말씀은 자주 인용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성전 예배를 소홀히 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를 방치하던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적 책망입니다. 백성의 불순종은 예배의 무너짐과 공동체의 돌봄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의 성도에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인색하게 붙들고, 교회와 이웃의 필요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원리는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이용하여 “정확히 10퍼센트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기 백성을 속량하셨습니다(갈 3:13). 그러므로 성도는 헌금 액수를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헌금 영수증의 액수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은 정확한 비율보다 자원함과 사랑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일을 책망하셨습니다(마 23:23). 예수님은 헌신의 외형만 남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사라진 신앙을 경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약 교회에 가르친 헌금의 원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따로 저축하여 두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며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신약은 정확히 10퍼센트라는 비율을 모든 성도에게 직접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정기성, 비례성, 자원성, 기쁨, 희생,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은 더 넉넉히 나눌 수 있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자신의 형편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살펴야 합니다. 헌금은 비교와 과시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고백하는 예배의 일부입니다.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라 믿음의 좋은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십일조를 율법적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계획 없이 남는 돈만 하나님께 드리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많은 성도에게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는 일은 물질에 대한 탐심을 다루고,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좋은 믿음의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안정된 소득이 있다면 십일조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 정기적이고 성실하게 헌금하는 것은 매우 귀한 헌신입니다. 다만 그것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성을 재는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가난한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가족의 필요한 책임을 방치하며, 정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실직, 질병, 채무, 돌봄 부담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성도가 있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십일조를 독촉하기보다 먼저 돌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의 형편을 이용해 헌금을 받아 내는 곳이 아니라, 함께 짐을 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헌금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가 기쁨으로 헌금할 수 있으려면 교회 역시 재정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회 재정은 목회자나 일부 지도자의 개인 재산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며, 예배와 선교, 교육, 구제,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맡겨진 것입니다.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그만큼 재정의 사용 내역을 성도에게 성실히 알리고, 독립적인 감사와 적절한 재정 관리 체계를 갖추며, 헌금이 복음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헌금을 내지 않는 성도를 공개적으로 압박하거나, 헌금 액수에 따라 직분이나 대우를 달리하는 일은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액수보다 마음만 보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만 보시니 헌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함께, 그 마음이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도 보십니다. 물질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신뢰의 대상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1).

그러나 “하나님은 액수를 보신다”는 말도 위험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액수로는 매우 작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헌신을 귀히 보셨습니다(막 12:41-44). 하나님께서는 타인과 비교된 액수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드려지는 진실한 헌신을 보십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드립니다

십일조는 꼭 내야만 하는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십일조를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죄받지 않으며, 정확히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더 큰 공로를 쌓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인색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재물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쌓아 두지 않게 됩니다.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형편이라면 감사함으로 정기적으로 구별하여 드리십시오. 아직 그 형편이 어렵다면 죄책감에 눌리기보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아뢰고, 가능한 범위에서 믿음으로 드리며, 더 건강한 물질의 질서를 세워 가십시오.

핵심은 “정확히 얼마를 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내 삶과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고백하며 살 것인가”입니다. 십일조는 그 고백을 훈련하는 귀한 방식이 될 수 있지만, 우리의 구원과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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